전설의 감독과 킴벌리 피어스가 마주 앉아 《파워 오브 도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토머스 새비지의 1967년도 소설 《파워 오브 도그》를 읽은 순간, 제인 캠피온은 1920년대 몬태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랑과 집착, 살인의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설의 영화감독에게도 이 야심찬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건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연출을 할 때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 엄청난 부담을 느끼게 돼요. 본인의 각본이든, 타인의 각본이든, 아이디어를 어떻게든 영상으로 구현해 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청나죠.” 캠피온이 말한다. “감독은 어떻게 이야기를 펼쳐낼지 상상할 수 있어야 해요. 때로는 촬영 장소도, 배우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상상을 해야 하죠. 꽤나 스트레스 받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 스트레스를 어디에도 비할 데 없는 부동의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은 캠피온이라 가능한 일이었이다. 2009년 《브라이트 스타》 이후 첫 장편 영화로 선보인 《파워 오브 도그》를 통해 캠피온은 매혹적인 캐릭터 탐구와 심리 스릴러를 담은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 영화를 섬세하게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오만함과 자기혐오의 결과로 타인에 대한 경멸을 키운 거친 사나이이자 종잡을 수 없는 소 목장주 필 버뱅크(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필은 남동생 조지(제시 플레먼스)와의 관계가 복잡하다. 침실을 함께 쓰면서도 동생을 지독하게 괴롭히기도 한다. 형에게 무시를 당하며 외로움을 느낀 조지는 과부인 로즈(커스틴 던스트)에게 구애하기 시작하고, 얼마 후 결혼한다. 하지만 로즈와 로즈의 10대 아들 피터(코디 스밋맥피)가 버뱅크 목장에 이사 오자 필은 이들을 위협하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 로즈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다. 그런데 상당히 지적이기도 한 필이 피터에게는 훨씬 친절한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자신의 멘토였던 브롱코 헨리에게서 배운 지혜를 피터에게 의욕적으로 전해주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골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조용하고 주변을 관찰하는 성격인 피터는 필이 알려준 것을 금방 학습하지만, 그가 갑작스레 목장일에 관심을 보이고 자기 엄마를 괴롭히는 사람과 가까워진 이유는 수수께끼에 가깝다.
《파워 오브 도그》는 202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공개된 후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영상미와 통찰력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극찬을 받으며, 오랫동안 캠피온의 수식어였던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더욱더 굳건히 했다. 캠피온은 1989년 데뷔작 《스위티》를 발표하고 4년이 지난 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탄 첫 번째 여성이 되었으며, 1993년 작 《피아노》로 아카데미 감독상에 노미네이트된 두 번째 여성이 되었다.
최근 제인 캠피온은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소년은 울지 않는다》와 《스탑 로스》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킴벌리 피어스와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파워 오브 도그》의 어떤 부분이 캠피온의 마음을 동하게 했는지, 캠피온의 연출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무엇인지, 그리고 새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위해 카메라 뒤에 설 때마다 여전히 불확실함을 느낀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다음 내용은 실제 인터뷰를 편집한 버전이다.
킴 피어스: 원작 이야기의 어떤 점에 매료되셨나요? 감독으로서 중요한 느낌을 받은 순간을 돌이켜 본다면, 그때 당시 떠오른 이미지나 느낌이 있었나요?
제인 캠피온: 이 모든 여정은 토머스 새비지가 소설에서 선보인 작업에 대한 엄청난 존경심에서 시작됐어요. 훌륭한 내러티브를 찾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저의 첫 느낌은 ‘이럴 수가, 이게 토머스 새비지의 삶이구나’였어요. 원작에서 그걸 다 느낄 수 있었죠. 그것이 처음부터 견고한 기반이 되어주었어요. 이 이야기는 양파처럼 꺼풀을 벗기고 벗겨도 늘 놀라운 것이 나왔어요. 끝이 없을 정도로 항상 뭔가가 더 있었고, 언제나 흥미로웠죠. 그 자체로 완벽한 이야기였고, 캐릭터가 확장되어 드러나고 위기에 빠지고 끝을 맺는 과정이 하나의 주제 아래 잘 묶여 있어요. 비극을 섬세하게 표현해낸 이야기예요.
KP: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이 참 놀라웠어요.
JC: 저는 영화가 아닌 것에서 영감을 찾는 것을 참 좋아해요. ‘영감을 줄 수 있는 영화를 봐야지’하는 마음으로 접근하면 그대로 따라 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돼요. 그렇게 되면 안 되죠. 대신 저는 그림을 찾아요. 루시안 프로이트의 작품을 많이 살펴봤고, 소설에서 필이 물속에서 벌거벗고 목욕하던 이미지를 계속 생각했어요. ‘필, 나는 당신의 옷을 벗길 거예요. 그 안에 숨은 아름다움이 있을 거예요. 당신은 위험하지만, 아름다워요’라고 생각하던 것이 기억이 나요.
KP: 흐름을 잘 타고 있는지 그러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지 딱 보면 아시나요? 흐름을 잘 타고 있는 순간이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아시나요?
JC: 배우들이 항상 아는지는 모르겠어요. 《브라이트 스타》를 찍을 때, 저는 보다 편안한 연기를 원했고, 제가 완전히 설득당하지 않으면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스스로 ‘지금 일어나는 일이 진심으로 믿어지지 않는다면 반응하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했죠. 일부러 무슨 술수를 쓰려고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제 솔직한 심정이었어요. 그렇게 2~3일이 지나고 나니 출연진들이 동요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벤 위쇼가 책상 같은 곳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땅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 모습을 제가 주의 깊게 보고 있더라고요. 그때 생각했죠. ‘이 남자가 믿어져.’ 갑자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엄청난 흥미가 생겼고 그걸 입 밖에 꺼냈어요. 그때부터 배우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냥 존재하면 된다는 것에 자신감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저 존재하는 것이 가장 매혹적인 것이랍니다.
KP: 감독님의 작품은 서스펜스가 항상 놀라워요. 관객으로서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언제 닥치게 될 줄은 모르죠.
JC: 서스펜스는 작품의 엔진과도 같아서, 정확히 조절하는 법을 아는 것이 중요해요. 이번에는 천천히 시작했다가 점점 가속하는 식이죠.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정보를 주어야 하는지가 핵심이죠. 정교하게 조절된 엔진이 있으면, 이제 이야기가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되는 건데, 내러티브가 요구하는 것도 어느 정도 있다 보니, 가령 필이 스카프를 가지고 노는 장면 같은 것은 넣을 공간이 없을 때가 있어요. 저는 ‘이 이야기에 적합한 엔진은 무엇일까?’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참 즐거워요.
KP: 영화에서 취약함을 다룬 방식이 정말 놀라워요. 커스틴은 얼굴로 그 모든 것을 심오하게 표현해 내더군요.
JC: 저는 날마다 커스틴의 매력에 더 깊이 빠져들어요. 소피아 코폴라의 아름다운 영화 《처녀 자살 소동》에서 커스틴의 연기를 본 뒤로 좋아하게 되었는데, 커스틴은 꼭 제나 롤런즈 같아요. 운명적인 아름다움이 있죠. 커스틴이 나이가 들면서 가슴에 더 와 닿는 것 같아요.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여성적인 존재감이나 내면의 선량함이요. 로즈가 필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배신 당하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KP: 코디의 연기에 대해 따로 디렉팅하신 부분이 있었나요? 코디의 변신이 참 놀라웠어요.
JC: 코디는 제가 강하게 밀어 붙여 주어서 정말 고마웠다고 하더군요. 때로는 누군가가 밀어주는 것이 필요하죠. 저는 코디에게 ‘알렉산더 테크닉’으로 걸음걸이를 연습해 볼 것을 제안했어요. 원작에서 캐릭터의 걸음걸이가 ‘뻣뻣한 걸음걸이’로 묘사되었거든요. 저는 코디가 걸음을 대충 흉내 내는 것이 아닌, 몸으로 직접 느껴보기를 원했어요. 스스로 본인의 모습이라고 느낄 만한 방법을 찾기를 원했죠. 코디는 천재적인 배우예요. 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하죠. 저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저런 것들을 실험해 보고, 시도해 보고, 함께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신뢰를 쌓는 것이에요. 다시 말하지만, 연출의 대부분은 ‘실패를 겪는 것’이니까요.
KP: 그 부분을 지금 돌이켜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 궁금해요.
JC: 사실 촬영 첫날 제가 조감독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나요.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 모든 게 실제로 어떻게 구현될지 지금 상상이 안 돼요.” 그랬더니 그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제인, 우리가 항상 하던 방식대로 할 거예요. 카메라를 설치할 거고, 그 앞에 사람들을 세울 거예요. 그리고 촬영을 할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맞아요, 그렇게 하는 거였죠.”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네’라는 생각에 휩싸일 때 펼쳐지는 기적이 있어요. 렌즈를 들여다 보는 순간, 바로 ‘아, 이건 아니지. 이건 여기에 있어야지’라는 생각이 들죠. 제 안의 무언가가 리드하기 시작하면서, 재미가 느껴지고 뭘 해야 할지 감이 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세트장에서 느끼는 흥분과 즐거움, 에너지, 머릿속 이미지가 실제로 구현될 때의 짜릿함, 배우들이 선사하는 놀라움이 참 좋아요.